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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주택이야기

르네상스 건축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건축은 이탈리아에 비해 많이 늦었으며 내용에서도 이탈리아 원본과 차이가 많이 났다. 프랑스, 영국, 독일 모두 고딕이 융성했던 나라로서 중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들어 알프스 이북에도 르네상스 건축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독자적 창출은 아니었고 이탈리아에서 전파된 것이었다.

세를리오와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의 성립

프랑스가 제일 빨랐다.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이탈리아와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고전주의를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1세(재위 1515~47)가 문을 열었다. 르네상스 애호가여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세를리오를 초빙하는 등 르네상스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3 혹은 1555)였다. 1541년에 프랑스로 이주해서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 겸 건축가가 되었으며 토네레(Tonnerre)의 앙시 르 프랑(Ancy-le-Franc, 1546년경) 성채를 대표작으로 남겼다. 프랑스에 최초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표준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한 점에서 향후 프랑스 르네상스의 전개 방향을 결정지은 중요성을 갖는다.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앙시 르 프랑 성채. 프랑스 르네상스의 본격적인 등장은 이탈리아 건축가 세를리오가 이주해서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전파하면서부터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오더 체계를 중심으로 구사했다. 벽면은 도리스식을 변형한 벽기둥으로 분할했고 출입문 차양은 코린트식을 변형한 독립 원형기둥으로 처리했다. 바탕 벽면에서 중세 장식을 완전히 제거해서 오더의 정확성과 고전적 의미를 높였다. 프랑스 전통 양식은 경사 지붕, 굴뚝, 측랑을 갖는 5분법 등이었다. 모두 이탈리아 고전주의에는 없던 서북유럽의 전통적인 구성방식이었다. 출입문 위쪽 벽면 등 부분적으로 매너리즘 기법을 이용해서 아치와 프랑스 전통 장식을 혼합한 새로운 장식 어휘를 창출했다.

 

 

들로름의 아네 성채와 프랑스 르네상스의 완성

세를리오가 다녀간 이후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은 피에르 레스코필리베르 들로름(Philibert de l'Orme, 1510년경~70)을 거쳐 완성 단계에 접어 들었으며 이후 뒤 세르소 가문으로 이어졌다. 제일 중요한 인물은 들로름이었다.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철거, 파괴 되는 등 대부분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데 대표작은 아네 성채(Chateau de Anet, 1547~55)와 슈농소의 화랑 다리(Pont Galerie, 1556~59)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가로는 최초로 이론서도 남겼는데 [건축 제1서(Le premier Tome d'Architecture(1567))가 대표작이다.

 

 

필리베르 들로름. 아네 성채 정문 출입구.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프랑스 중세 성채 구성을 고전주의로 다듬은 건물이다.

 

 

필리베르 들로름. 아네 성채 예배당. 드럼과 돔만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중앙 집중 형 건물로 고전 어휘는 출입구에 부분적으로 부속되어 있다.

들로름의 건축은 매우 독특해서 이탈리아 고전주의와는 많이 달랐으며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생김새를 보여준다. 개인적 독창성이 크게 작용했으며 프랑스다운 전통을 가미했다. 아네 성채가 좋은 예로, 출입문과 예배당이 중심 건물이었다. 출입문은 로마의 개선 아치를 기본 모티브로 삼아 매너리즘으로 각색했다. 개선 아치의 구성과 부재의 위치는 고전주의 표준형을 구사했다. 매너리즘은 프랑스 중세 전통과 장식을 혼용하는 방식으로 구사했다. 오더 자체가 고전주의 표준형 다섯 가지에는 없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가 찾고자 했던 프랑스 오더의 한 종류를 제시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처리는 수직 구성으로 ‘오더-아치-지붕’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면서 하늘을 향한 수직성을 표현했다. 수직성은 프랑스의 중세 전통이었다.


예배당은 프랑스 최초의 중앙 집중형 건물이다. 원형 중심부를 정사각형 윤곽이 싸는 구성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없던 새로운 유형이었다. 돔도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펜던티브 방식이 아니라 로마의 원형무덤이나 판테온 방식이었다. 외관도 이탈리아에서는 실내 구성과 별도로 개선아치와 신전 박공 등의 고전 어휘로 치장하는 것이 통례인데 반해 여기에서는 실내 구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 위에 엔타블러쳐를 단순화한 수평 띠, 아치, 박공 등의 고전 어휘를 더했다. 출입문과 마찬가지로 수직성을 이용해서 중세 전통을 표현했다. 드럼과 랜턴의 높이를 인위적으로 높였으며 첨탑 두 개를 더했다.

 

 

이니고 존스와 영국 르네상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프랑스보다 1세기 가량 늦어서 1600년이 되어야 시작되었다. 고딕 양식이 늦게 계속되었으며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멀었다.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양식 운동은 17세기나 되어야 나타났다.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다. 스튜어트 왕조(1603~88)의 제임스 1세(재위 1603~25)와 찰스 1세(재위 1625~49)가 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이 필요해졌다.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되었다.

 

 

이니고 존스. 그리니치 궁전. 영국 르네상스 건축은 이탈리아 고전주의를 직설적으로 모방하며 시작되었는데 이 건물은 그 시작을 알린다.

 

 

이것을 이끈 것은 이니고 존스(Inigo Jones, 1573~1652)였다. 귀족을 대동한 1613~15년의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르네상스 도서와 도면 등 많은 자료를 구입해서 돌아온 뒤 이를 연구해서 르네상스 양식의 작품을 남기기 시작했다. 초반 2~3년의 탐색기 동안은 영국 전통양식을 혼용해서 들로름식의 지역주의 양식을 시도했으나 곧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정착했다. 영국 르네상스는 존스 한 명이 이끌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이며 내용에서도 이탈리아 표준 고전주의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때문에 존스 개인적으로나 양식 전체적으로나 이렇다 할 독창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작은 그리니치 궁전(Greenwich Palace=Queen's House, 1616년경~35)이었다. 그리니치 궁전은 영국 건축사에서 최초로, 그리고 갑작스럽게 고전주의 표준어휘가 등장한 건물이었다. 북쪽 면은 아직 전환기의 고민을 보여준다. 고전 어휘는 1층의 창 상인방에 쓰인 평아치 정도가 전부였다. 장식을 극도로 절제한 추상 평활 면은 이후 고전주의로의 정착을 예견하고 있지만 영국의 전통적인 계단을 덧붙인 점은 아직 지역주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남쪽 면에서는 브라만테의 라파엘 하우스 모티브와 팔라디오의 빌라 모티브를 혼합하며 순도 높은 고전 어휘를 선 보였다. 1층은 북쪽 면과 유사하게 몰탈 선을 두껍게 처리한 돌쌓기와 평아치를 이용해서 러스티케이션을 암시 했다. 2층 중앙부는 이오니아식 오더 여섯 개로 이루어진 로지아로 처리했다.

 

 

종교개혁과 독일 매너리즘

독일은 세 나라 가운데 르네상스 건축이 제일 침체되었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어휘를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 르네상스는 미진했다. 독일 내부 사정이 제일 큰 이유였다. 종교개혁의 발상지로서 16세기부터 크고 작은 종교분쟁과 전쟁이 이어졌으며 1618년에는 급기야 대표적인 신-구교 전쟁인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매너리즘의 조건인 ‘힘든 사회상황’을 대표하는 나라였다. 이 때문에 독일 르네상스는 매너리즘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이 일탈이나 파격을 추구한 것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프리드리히 수스트리스. 성 미카엘. 독일 르네상스 건축은 힘든 국내 사정 때문에
매너리즘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독일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J. 하인츠. 아우구스부르크 병기고. 독일 매너리즘은 고전 어휘를 조각 내 사용해서 흥겨운 리듬감과 가벼운 장식 분위기를 보여준다.

대표작은 프리드리히 주스트리스(Friedrich Sustris)의 성 미카엘(Sankt Michael, 뮌헨, 1583~97)과 J. 하인츠(J. Heintz)의 아우크스부르크 병기고(Zeughaus, Augusburg, 1602~07) 등이다. 성 미카엘은 비례를 무시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독일의 전통적인 다층 형으로 전체 윤곽을 짰다. 기둥 사이를 아치 창, 벽감, 막힌 벽 등으로 처리했는데 위아래가 달랐다. 수평선을 필요 이상으로 여러 겹 넣어 전체 윤곽의 수직 비례와 대비시켰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반항과 부정과 달리 엇박자의 율동 느낌을 내면서 고전 어휘는 표준 건축부재보다는 기하학적인 장식부재에 가까웠다. 고전 어휘의 생명인 축조다움을 생략하고 판재를 오려붙인 것 같은 장식 느낌이 건물 전면을 지배했다.

 글·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